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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01 페르시아 왕국에 대해서

페르시아 왕국은 키루스 2세가 기원전 550년경에 세워 기원전 330년경에 멸망한나라이이며,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라고도 한다.

 

페르시아인들은 기원전 7세경 이란의 남부로 이주, 이곳을 근거지로 정착했다. 정착 당시에는 독립국가가 아닌 메디아 왕국에 속한 영토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559년에 키루스 2세가 메디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아케메네스왕국을 수립하자 이란 남부의 한 지방을 가르키던 '파르사'란 명칭이 이란 전역을 뜻하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즉 페르시아란 이름은 외부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페르시아 민족의 자기 정체성의 기반은 초기 아케네메스 왕조에 의해 완성된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볼 수 있다.

 

키루스 2세(BC. 590~ BC. 530)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는 키루스 1세이며 그는 페르시아인들을 통합했으며, 그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는 메디아왕국의 공주 만다인과 혼인함으로서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합했다. 이때까지 아케메네스 왕조는 메디아 왕국에 종속된 지방의 영주에 불과하였으나,  캄비세스의 장남 키루스 2세가 메디아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신바빌로니아와 연대해 메디아를 무너뜨렸다. 그후 키루스는 소아시아까지 수중에 넣었으며, 기원전 539년에 신바빌로니아까지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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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2세

 

신 바빌로니아는 키루스에게 정복당하기전  바빌로니아를 비롯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왕국과 시리아왕국등 많은 왕국들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키루스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때부터 키루스 2세는 자신을 "바빌론의 왕,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 세계의 사면의 왕"으로 칭했다.

 

키루스 2세는 그의 특유의 관용정책으로 바빌론에 잡혀와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고 유대인의 신성한 얘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허락했으며, 유대교의 신앙과 제례의식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된 키루스 2세는 그러나 전쟁 중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사망했다. 기록에 따르면 키루스의 죽음은  기원전 530년 8월경이라고 한다. 죽은후 키루스의 시신은 파사르가다에로 옮겨져 성대하게 장사지냈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파사르가다에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의 무덤은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키

 

키루스 2세의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왕위에 올라 수행했다.  그러나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고, 그 뒤를 이은 왕이 다리우스 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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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500년경의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다리우스 1세 (BC. 558 ~ BC.486)


다리우스는 제국 전역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B.C. 521년 12월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다리우스 1세와 그를 계승한 크르크세스 1세의 통치 기간 중 아케메네스 제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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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1세

 

다리우스 1세와 크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에 아케메네스 제국은 동서로는 인더스강, 히파시스강에서  리비아까지, 남북으로는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에서 카프카스 산맥과 중앙아시아의 시르다리야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다리우스는 전국토를 20개 주로 나누었으며, 징세와 병역을 부과했다. 그리고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다. 또한 정복민에 대해서도 관대했으며, 각 지방의 독자적인 문화와 전통을 존중했지만, '왕의 귀' 라고 불리우는 치안,정보망을 가동해 왕에게 충성하는지를 감시했다.

 

또한 활발한 건축 사업을 벌여,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파르사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엘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세웠다. 특히 다리우스 1세의 정복 활동을 묘사한  비수툰(Biston) 부조를 비롯하여 수많은 예술 작품과 세공품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뛰어난 예술 양식을 보여준다.

 

'왕의 길' 이라는 도로망의 확충에도 관심을 기울여,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총 2,400 km에 달하는 왕도(王道)를 건설하고, 역전제를 도입하여 각 역에 역마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쟁시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여러 국가의 모범이 되었다.

 

페르시아 전쟁(BC. 492 ~ BC. 448)

 

BC 492년부터 BC 448년까지 지속된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원정 전쟁으로, 그리스의여러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에 연합 대응하여 성공적으로 공격을 막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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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원정

이오니아 반란(BC 499∼BC 494)을 일으키자, 다리우스 1세는 이를 먼저 진압하고자 했으며, BC 494년 이오니아 소도시들을 모두 점령했다. 다리우스 1세는 BC 492년 함대를 정렬하고, 그리스 북쪽에 있는 트라키아 원정을 시작했고, 함대는 헬레스폰트 해협(Hellespont, 오늘날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했다. 그러나 함대는 아토스(Athos) 곶(串)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했으며,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300척의 전함과 20,000명의 군사를 잃었다고 한다.

 

2차 원정

페르시아 함대는 키클라데스 제도 연안을 따라 에우보이아의 에레트리아를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키고, 이어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마라톤 평야에 상륙, 아테네를 공격하였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파르타는 종교행사를 이유로 파병을 지체했고, 아테네는 1만 명 본군과 프라타이아에서 온 1천 명의 지원군으로 페르시아 군과 맞섰다. 그러나 아테네군은 페르시아에 크게 이겼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군은 6,400명을 잃은 반면 아테네군은 192명만을 잃었다. 이 전투는 마라톤 전투로 불리운다,

 

3차 원정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유능한 지휘관 마르도니우스가 이미 죽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그는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대규모 병력으로 그리스와 맞섰으나,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를 살라미스 해전 이라고 한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다(BC 449).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부터 왕족 내부에 파벌이 형성되면서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 후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할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3세 즉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제국 깊숙히 동진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그리스군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네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빠른 속도로 점령했으며,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다.

 

다음해 6월 다리우스 3세가 자신의 부하 베수스(Bessus)에게 암살당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 후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멸망한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인해 헬레니즘 문명에 의한 페르시아 통치가 지속되다가 BC 250년에  파르티아제국(250 BC–AD 226)이 들어서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 그 후  사산왕조(226–651),  사파비왕조(1500–1722),  팔레비왕조(1925-1979) 등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


 

 

페르세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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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이었던 장엄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1세가 즉위한 후  파사르가다에 건설된 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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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배후에 두고 사면을 이용하여 석조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궁전, 후궁, 보고, 기록보존소, 아파다나(알현전), 백주궁전 등을 줄지어 지은 장대한 것이었으나  알랙산드르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때 소실되었다(BC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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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페르세폴리스 유적 입구에는 거대한 인면유익(人面有翊:사람의 얼굴에 날개를 가진) 황소상이 2쌍 조각되어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다른 하나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아파다나(알현전)는 72개의 대원주(大圓柱:높이 20m)로 받쳐져 있고, 주두는 황소와 뿔이 난 사자머리로 장식되어 있으며, 아파다나에 오르는 계단 측벽에는 전세계에서 조공하는 민족의 돋을새김]이 있는 등 당시의  오리엔트 건축미술을 집대성한 것이다.

 

왕의 집무실인 다차나에는 옥좌에 앉은 다리우스 1세와  왕세자 크세르크세르 아래로 신하들이 줄을 맞추어 서 있다. 또한 기록보존소에서 출토한 점토판 문서 약 2만 장을 통하여 당시의 사회·경제가 밝혀졌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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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의 문

 

세워진 후 100년이 넘도록 세계의 문화와 교역의 심장부 역할을 했다.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의 문물이 만나는 곳으로 그 당시 외국 사신들과 동서양의 상인들로 늘 북적거렸다. 화려한 조각과 거대한 기둥으로 만든 도시의 입구는 '만국의 문'으로 불리우며 당시 페르세폴리스의 자긍심과 그들의 풍요를 상징했다.

 

 

페르시아의 황금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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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naver.com/shee0109?Redirect=Log&logNo=40058430395

Posted by 숨쉬는 순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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